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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 시절 62] 조병득' 80년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수문장

2012-07-16 00:00:00 8,067

1987년 당시의 포항 멤버들(맨 아랫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조병득) ⓒ월간축구



대표팀의 붙박이 멤버로 자리 잡다

1977년에 대표2진에 뽑혔던 조병득은 곧이어 대표팀에도 선발됐다. 당시 대표팀을 맡고 있던 함흥철 감독은 골키퍼 출신이었고' 조병득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조병득은 함흥철 감독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더불어 대선배인 김황호' 김희천 등과 함께 하면서 한 단계 성장했다.

“처음 대표팀에 뽑혔을 때는 멋모르고 천방지축이었던 나이였잖아요. 그래서 저도 선배들보다 충분히 더 잘할 수 있다는 마음이었어요.(웃음) 훈련을 하면서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죠. 선배들을 따라가기도 벅찼어요. 그래도 함흥철 감독님께서 훈련을 많이 시켜주셨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마침 이 시기는 대표팀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조병득에게는 기회였다. 그는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1979년부터 서서히 대표팀의 주전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1979년 5월 8일 열렸던 페루 클럽 스포르팅 크리스탈전에서 처음 대표팀 골문을 책임졌고' 그해 9월 12일 박대통령배 스리랑카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조병득은 1980년 쿠웨이트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에서 드디어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 대회에서 그는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 출장했고' 대표팀은 준우승을 차지했다. ‘조병득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그 무렵이 마침 대표팀에 새로운 얼굴들이 들어오는 시점이었어요. 저 외에도 1년 위인 이강조' 이장수 선배도 들어왔고' 최순호나 장외룡' 정해원 등의 후배들도 들어오기 시작했죠. ”

“제 경우에는 김황호 선배가 워낙 독보적이었거든요. 골키퍼로서는 작은 키를 극복한 케이스였어요. 몸이 빠르고 상당히 과감했죠. 단신임에도 공중볼 처리도 과감하게 하고요. 저도 그런 부분을 많이 배웠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에게 기회가 주어줬습니다.”

젊은 나이에 대표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았던 이면에는 조병득의 땀이 숨어 있었다. 모든 성공한 선수들이 그러하듯 조병득 역시 요령 피우지 않고 훈련에만 매진한 ‘성실맨’이었다.

“당시에는 제가 장신이었거든요. 그럼에도 유연하고 민첩했어요. 탄력도 좋았고요. 무엇보다 훈련을 엄청나게 했죠. 앞서 이야기했듯이 GK코치가 없다보니 전문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후배들을 슈팅이나 크로스를 계속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정말 쉴 새 없이 슈팅을 막고 크로스를 잡고 다이빙을 했죠.(웃음)”

“무엇보다 대표팀에서 함흥철 감독님을 만나면서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정말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어요. 그러나 절대 요령은 피지 않았죠. 아프다고 쉰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계속 들락날락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화장실을 오가면서 훈련을 계속 했어요.(웃음)”

“돌아보면 어린 시절부터 죽기살기로 해왔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는 모래사장에서 끊임없이 몸을 던지며 연마했고' 조회하는 구령대에서 땅으로 다이빙도 하고 그랬어요. 석유 드럼통을 옮겨 그 위에서 자갈밭으로 다이빙도 하고요.(웃음) 무협지에 나올 법한 내용이죠. 무모하게 했지만' 자세를 제대로 갖추고 반복해서 하니까 다치지는 않더군요.(웃음) 그런 훈련으로 세이빙 자세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킥도 어릴 때는 제대로 못 차서 다른 애들이 토요일에 외출할 때 공을 물에 푹 담가놨다가 산 비탈에서 무거워진 공을 계속 찼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86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하기 직전 ⓒKFA



1983년' 할렐루야 입단..K리그 원년 우승의 기쁨 맛봐

명지대를 졸업한 조병득의 진로는 축구계의 큰 관심거리였다. 이미 대표팀의 주전 수문장으로 자리 잡은 그를 잡기 위해 여러 팀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조병득의 선택은 할렐루야였다.

조병득은 할렐루야 입단 첫 해에 팀을 K리그(당시 슈퍼리그)에서 원년 챔피언에 올랐고' 베스트11과 우수GK상을 수상했다. 이후 조병득은 1985년까지 할렐루야에서 뛰며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할렐루야가 1986년에 아마추어로 내려가자 1987년에 포철로 이적해 여전히 톱 레벨의 기량을 뽐냈다.

“친정팀인 포철로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신앙적인 부분이 작용해 할렐루야에 입단했었죠. 또한 초창기 할렐루야는 대표급 선수들이 모여 있는 강팀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1985시즌 도중에 프로 탈퇴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당시 7경기 무실점을 하는 등 좋은 페이스였는데' 선수들 모두 의욕을 잃어버렸죠. 다른 팀을 알아보는 선수들도 생겼고요.”

“당시 86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할 때였는데' 저는 신앙인으로서 월드컵을 할렐루야 소속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른 팀들의 제의를 모두 거부하고 할렐루야에 남았던 거예요. 그래서 86년에는 K리그에서의 기록이 하나도 없습니다. 87년부터 다시 포철 유니폼을 입고 뛰었죠.”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86 멕시코 월드컵

80년대 초중반은 사실상 ‘골키퍼하면 조병득’이었다. 86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도 대표팀의 1번 골키퍼는 조병득이었다. 그러나 정작 월드컵 본선에서 조병득은 벤치에만 머물러야 했다. 그를 대신해 오연교가 골문을 지켰다. 이 부분에 대해 조병득은 말을 아꼈다.

“월드컵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그리고 끝난 후에도 ‘왜 조병득을 뛰게 하지 않았나’라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러나 선수로서는 감독의 말에 따를 뿐이죠. 월드컵을 뛰고 싶지 않은 선수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그 중에서 11명이 뛰는 것이고' 코칭스태프가 판단해서 결정한 것이잖아요. 아쉬움은 남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2년 만의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에게 패하고' 불가리아와 비기면서 1무 2패로 대회를 마감했다. 아마도 조병득으로서도 여러 의미로 잊지 못할 대회였을 것이다.

월드컵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난 뒤' 조병득은 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주전 자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대표팀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조병득은 고비였던 이란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승을 이끄는 등 활약을 펼치며' 월드컵에서의 아쉬움을 털어버렸다.

“어쩌면 우리 스포츠계에서 가장 축제 분위기가 고조됐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이란과의 8강전이 고비였는데' 승부차기에서 이기면서 이후에는 여유 있게 우승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86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을 당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병득) ⓒ한국축구100년사



88 서울 올림픽과 카타르 아시안컵..대표팀에서의 피날레

어느덧 30줄을 넘어선 조병득에게 1988년 서울 올림픽과 카타르 아시안컵은 마지막을 불사를 수 있는 무대였다.

조병득은 팀의 고참으로서 주장 완장을 차고 후배들을 이끌었다. 대회를 앞두고 불협화음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박종환 감독이 물러나고 김정남 감독이 지휘봉을 잡는 등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조병득은 팀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대표팀은 소련' 미국과 각각 0-0으로 비기면서 조 예선 통과의 기대를 높였지만' 아르헨티나와의 최종전에서 1-2로 패하면서 결국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분명 아쉬움은 있죠. 올림픽을 앞두고 팀의 수장이 바뀌는 등 어수선했잖아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죠. 아르헨티나와의 최종전에서도 실점한 장면을 보면 슈팅이 우리 수비수를 슬쩍 스치면서 방향이 바뀌었어요.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볼이었는데' 안 되려니까 이렇게 되는 거죠.(웃음)”

올림픽에 이어 열린 아시안컵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조별리그에서 일본과 이란 등을 완파하고 4강 중국전까지 승리하면서 결승에 안착했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승부차기로 패하고 말았다.

“사우디와의 결승전이 많이 아쉬워요. 승부차기에서도 대부분 키커의 슈팅 방향을 잡았거든요. 상대가 잘 차긴 했지만' 제가 조금만 더 반응이 빨랐다면' 한 스텝만 미리 움직였어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금도 당시 기억이 생생하네요.”




87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우승 후 호주와 유니폼을 바꿔입은 선수들. 정중앙에 조병득 ⓒKFA



1990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 마무리

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 초기에만 해도 조병득은 주전 수문장으로 나섰다. 그러나 최종예선에 접어들면서 대표팀 체제는 김풍주' 최인영 등이 중심이 되었고' 조병득은 자연스레 대표팀과 멀어졌다.

그러나 포철에서는 23게임에 나서 23실점을 기록해 경기당 1실점만을 하는 등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충분히 몇 년간은 더 현역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던 그는 90시즌이 끝난 후 갑작스럽게 현역 생활을 접었다. 독일에서 돌아와 현대(현 울산) 사령탑으로 부임한 차범근 감독의 러브콜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사실 좀 더 현역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차범근 감독님이 귀국해 현대를 맡으시면서 저에게 GK코치로 와 달라는 제의를 하셨죠.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고민했습니다.(웃음) 그리고 가기로 결정했죠. 차범근 감독님과 가깝기도 했고' 그 분이 독일에서 얻었던 노하우들을 배우고 싶기도 했어요. 언젠가는 지도자를 할 텐데' 이것이 인생의 또 다른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조병득은 할렐루야 감독' 전남 GK코치 등을 거쳐 수원에서 차범근 감독과 다시 조우했고' 차 감독이 사임하자 함께 물러났다. 그 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그는 조만간 다시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일단 원하는 곳이 있어야 할 테고' 기회가 닿아야겠죠. 나름대로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웃음)”




88 서울올림픽 미국전에 출전했을 때. ⓒ월간축구



마지막으로 조병득은 어린 골키퍼 유망주들에게 조언 한 마디를 남겼다.

“어린 선수들일수록 뚜렷한 목표를 갖고'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기본을 잘 잡아놓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성인 선수들과 주로 함께 했는데' 프로에 들어온 선수들도 기본 자세부터 문제가 있어 교정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성인 선수들은 굳어진 자세를 교정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결국 기본 틀을 교정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상황 속에서 장점을 최대한 살려주는데 노력했어요.”

“현대 시절 김병지도 생각나는데' 당시 병지는 한 스텝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항상 두 발로 움직였어요. 그럴 경우 타이밍상으로 막기 힘들거든요. 이런 부분을 교정하려고 노력했는데' 병지의 경우는 자신이 노력해서 고쳐나갔던 것이 기억납니다.”

“협회에서도 유소년 골키퍼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앞서 말했지만 어릴 때 기본기를 확실히 잡아줘야 합니다. 다 성장한 다음에 교정하려고 하면 선수도 힘들고' 코치도 힘들어요. 개인적으로도 재능기부의 형태로 유소년들을 지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글=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2년 7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1980년대를 대표했던 골키퍼 조병득 ⓒ이상헌



1980년대 한국축구를 지켜봤던 이들이라면 ‘골키퍼’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 것이다.
바로 조병득(54)이다. 19세였던 1977년에 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그는 1989년까지 대표팀 부동의 수문장으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통산 44회의 A매치에 출전했던 조병득은 1980년 아시안컵 준우승'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참가 및 아시안게임 우승' 1988년 아시안컵 준우승 등의 성과를 올렸다. 또한 할렐루야 소속으로 K리그 원년 멤버로 활약하며 팀 우승을 이끌었고' 이후 포철(현 포항)에서도 정상급의 플레이로 ‘골문의 수호신’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골키퍼로서 갖춰야할 캐칭과 세이빙' 공중볼 처리' 스로잉과 롱킥 등을 골고루 갖춰 가장 이상적인 골키퍼로 평가받았던 조병득. 그의 축구 인생을 돌아본다.

골키퍼의 길을 걷다

조병득이 처음 축구를 시작한 것은 축현초 4학년 때였다. 강화에서 자란 조병득은 공부를 위해 인천으로 유학을 갔지만' 거기서 공부가 아닌 축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수비수로 뛰었던 그는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골키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래 공부하라고 부모님이 인천에 보냈는데' 고향 선배님이 축현초 축구부 코치셨어요. 그 분을 만나서 축구를 시작했죠. 처음에는 풀백이나 센터백으로 뛰다가 1년이 지났는데' 팀에 골키퍼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하게 됐는데' 학교도 성적을 내고 저도 두각을 나타냈죠. 골키퍼가 천직이었나 봅니다.(웃음)”

축현초는 인천 지역 최강팀으로 올라섰고' 전국대회에서도 선전을 펼쳤다. 조병득은 주장 완장까지 차고 수문장으로서 팀을 이끌며 축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무렵에 맨땅은 아프니까 근처 바다의 모래사장으로 가서 엄청나게 다이빙 훈련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GK코치도 없으니까 그냥 수백번씩 다이빙 훈련을 했죠.(웃음)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하면서 저도 모르게 터득한 부분도 많은 것 같아요.”




인터뷰 중인 모습 ⓒ이상헌



서울체중-서울체고의 1기생으로 활약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여러 학교를 놓고 고심 중이었던 조병득은 서울체중이 생긴다는 소식을 접했다. 스포츠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학교가 생긴 것이기에 조병득은 서울체중에 응시했다.

“입시시험도 치르고' 체력장도 하고' 아이큐 테스트도 하더군요.(웃음) 어쨌든 뽑혔는데' 처음에는 전체 운동을 하면서 특별활동 시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운동부로 갔어요. 저는 당연히 축구부였죠. 수업도 정상적으로 전부 받고' 육상도 하고' 특별활동 시간에 축구를 했죠. 학교 방침이 학생들을 전체적으로 고루고루 발전시키겠다는 것이었어요.”

서울체중을 졸업한 조병득은 고등학교 역시 새로 생긴 서울체고로 결정했다. 그리고 2학년 시절부터 팀이 확실히 체계가 잡히면서 전국대회에서도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조병득의 활약도 대단해서 고3 시절인 1977년에는 U-19 대표팀에 뽑혀 이란에서 열린 AFC U-19 챔피언십에도 참가했다.

“이 시절을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어요. 그 시절에는 4강 제도가 있었거든요. 우리가 우승도 몇 번 했었기 때문에 경기에 나섰던 선수들은 이미 4강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죠. 그런데 경기에 한 번도 나서지 못했던 선수들은 그 혜택이 없거든요.”

“3학년 마지막 대회에서 그 선수들이 경기에 나섰고' 8강에서 승부차기를 하게 됐어요. 성적에 대한 큰 부담이 없었던 저는 여유 있게 골대를 향해 나섰는데' 몇몇 친구들이 정말 간절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더군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요. 결국 승부차기에서 이겨 4강행이 결정되었고' 정말 좋아하던 그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네요.”

대표팀 첫 발탁..대학이 아닌 포철 입단

1977년 AFC U-19 챔피언십에 참가하고 온 조병득은 가능성을 인정받아 그 해에 대표2진에 합류했다. 당시 대표2진에는 1년 선배인 김재원이 주전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젊은 유망주 두 명이 골키퍼 포지션에서 경쟁하게 된 셈.

“그 형을 대표2진에서 만나면서 드디어 대표팀에서의 경쟁이 시작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같은 또래니까 앞으로도 계속 맞부딪쳐야 하잖아요. 결국 나중에는 제가 주전을 차지하게 됐죠.(웃음)”

1년 선배 김재원은 조병득의 대학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초 고려대에서 적극적인 스카우트를 했지만' 김재원이 바로 고려대에 있었다. 그래서 고려대를 포기하고 다른 학교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실업 최강이었던 포항제철(현 포항)에서 입단 제의가 왔다.

“처음에는 고려대가 유력했는데' 김재원 선배가 있었어요. 그 선배가 졸업하기 전까지는 나에게 기회가 거의 안 올 것 같았고' 그러면 3년을 성장 없이 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때 마침 포철에서 제의가 와서 가게 됐습니다.”

“사실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포철에서 데려가면서 야간 대학이라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었죠. 그래서 명지대 야간에 입학했어요. 낮에는 운동하고 저녁에 학교 가서 공부하면서 2년을 보냈는데' 너무 힘들더군요. 도저히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아 포철을 그만두고 명지대로 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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